북한을 알아보자 -3- 1950.06.25 한국전쟁 발발 1편.

네, 드디어 본론 진입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이하 6.25
한국전쟁 발발

북한군은 38선 일대에서 국군을 향한 포격을 시작하며 한국전쟁의 시작을 알립니다.

38선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지원하기로 하면서 정해진
당시에는 임시적인 구분이었지만,
결국 남북 분단의 경계가 된 곳이라
미리 알려드렸지요?

그선을
약 8만 9천 명의 북한군이

소련제 T-34 전차 약 200대 와

소련제 Yak-9·Yak-7(전투기), Il-10(지상공격기), Po-2(훈련·정찰기)
항공기 약 120대 를 앞세워 남침했습니다.

소련으로 부터 지원된 무기들을 제외하면

당시 남과북의 군사력 차이는 거의 없는듯 했으므로
사실상 전쟁시작부터 소련과 함께 했다고 해석해도 됩니다.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단순 개입,지원이라기보단

저 위의 탱크와 전투기들을 통한 압도적 군사력 차이가 없었다면
전쟁개시조차 불가했으므로

필수요소이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그럼 6월 25일 당시 남측 상황은 어땠을까요?

그냥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949년 6월 말 미군 점령군은 사실상 철수했고

그저 약 500명 규모의 미군군사고문단이 남아
한국군의 조직·훈련을 지원하고 있었을 뿐이죠.

전투기는 고사하고
탱크 1대 조차 없었으며

말 그대로 그냥 총 한자루 쥐고
탱크랑 전투기를 막아야 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시 탱크와 전투기를 동반한 선제공격은

마치 핵과 같은 비대칭전력 아니었을까요?

그로 인해 단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내어 주게 되었고

방어와 퇴각을 반복하며 점점 더 남쪽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 6.25 당시 미군과 UN군의 타임라인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950년 6월 25일 — 결의 82호: 북한군의 무력 공격 규탄 및 38선 이북 철수 요구.
1950년 6월 27일 — 결의 83호: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을 지원할 것을 권고.
1950년 7월 7일 — 결의 84호: 미국 주도의 유엔군 통합사령부 설치.

UN군 중 영국군 제27보병여단 약 1,578명 이 도착한 8월 29일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합류

호주 공군은 7월 2일부터 전투 임무를 수행.
일본 이와쿠니 기지에서 P-51 머스탱 전투기를 출격시켜
7월 3일 북한군의 보급로 차단 시도

미군 지상군 투입

1950년 7월 1일 — 일본 규슈에 주둔하던 미 제24보병사단 소속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첫번째 전투병력이라 여겨집니다.

1950년 7월 5일 — 오산 죽미령 전투
약 540명의 보병 2개 중대와 105mm 곡사포 6문을 중심으로 편성

vs

북한군 약 5,000명과 전차 34대

병력 규모 차이가 말이 안되지요?

하지만 그들은 6시간을 벌어냈고,

후속 병력이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이때부터 미군은 추가병력을 계속 투입하며
지연전을 벌이며 남쪽으로 후퇴합니다.

오산 전투 이후 주요 전투 연표

날짜주요 전투지전개
7월 5일오산 죽미령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북한군과 교전 후 철수
7월 8~12일조치원미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
7월 13~16일금강 방어선미군이 금강 일대에서 방어전을 벌인 뒤 후퇴
7월 19~20일대전미 제24보병사단 등이 방어했으나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
7월 하순영동·상주 방면미군과 한국군이 후퇴하며 방어전 지속
7월 하순~8월 초진주·마산 방면북한군의 남서부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전투
8월 초낙동강 방어선한국군과 미군이 부산 교두보를 구축하고 방어에 집중
8월~9월 중순다부동·대구·마산·포항 일대북한군의 부산 방어선 돌파 시도를 저지

위는 주요 전투이고

부산으로 퇴각하기까지의 흐름을
대략 표시하면

이렇게 됩니다.

부산으로 밀리기까지
반대로 위로 올라가는 화살표는 단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위로 진격하고 승리까지 해낸 전투가 있지만
큰 흐름에는 지장을 주지 못했습니다.

미군이 도와줬는데도 왜 저렇게 수세에만 몰리게 됐던걸까요?

그 이유는 미군과 UN군의 증원 속도보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뒤로 밀리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입니다.

초반에 말씀드린대로
갖은건 총밖에 없는 상태에서
수만의 병력이 탱크와 전투기로 기습 공격을 행했습니다.

증원되는 미군의 규모도 초반에는
500명단위 1000명 단위였으니

그들이 각각 탱크와 제트기를 타고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본대가 오기까지 지연전을 벌이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던 것이죠.

다행히 첫번째 대규모 부대 약 13,059명 ( 미 제25보병사단) 의 상륙이


1950년 7월 10~15일 부산에 이루어져

버틸 수 있었고

이들이 전투를 지연시켜 주었기 때문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지요.

이후

전투지역을 우회하여

바로 예천까지 진격해 승리를 거뒀으나
계속 밀고 내려오는 북한국의 압박으로 인해

다시 후방으로 방향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7월 20일 예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시 방향을 바꿔
8월 3일 마산에 도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가장 치열한 격전지이자 방어지 중 하나로 꼽히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약 6주간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맥아더장군의 지휘 하에

1950.09.15 인천상륙작전

이 개시 됩니다.

빨갛게 물들이기까지 단 한걸음만 남겨 놓은

북한군에게
기가 막힌 카운터를 먹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보급로 즉

뒤를 완벽히 끊어버립니다.

이들은

일본 고베와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돌아서 상륙했는데요.

일본 고베 → 인천: 미 제1해병사단은 9월 11일 출항해 9월 15일 상륙했으므로, 약 4일 소요.

부산 → 인천: 미 제5해병연대는 9월 12일 부산을 출발해 9월 15일 상륙했으므로, 약 3일 소요.

정말 긴 4일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15일 첫상륙부터

9월 16일 밤까지: 약 15,000명 상륙, 차량 약 1,500대

9월 18일: 최초 상륙하기로 한 병력과 차량 상륙 완료

9월 21일까지
추가병력 53,882명, 차량 6,629대, 화물 25,512톤 하역 완료

상륙작전 이후
부산 방어선에서도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북쪽으로 몰아내며 진격했고, 9월 26일 오산 부근에서

인천에 상륙한 미 제7사단 병력과 조우했습니다.
이를 **오산 연결 작전(Rendezvous at Osan)**이라고 합니다.

이후

09.28일 서울을 되찾고

10월초에 38선을 돌파
북진을 하며

한국전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더 이상 진격을 허용하면

중국과 소련의 턱밑으로 미국군이 자리를 잡게 생겼거든요.

네, 중국과 소련이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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